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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그리고 향로봉을 추억하며..

포보기(박해철) 2002. 10. 23. 21:22

이글은 지난 97년에 만든 제 개인홈페이지에 올렸던글을 '이야기마당' 메뉴가 활성화 되길 바라는 맘에서 올려 봅니다.

우리 회원님들도 별 대단한 사연이 아니더라도, 추억들의 자그만 단편들을 같이 공유 했음 좋겠네요.


 

향로봉은 행정구역상 인제군 북면 원통리이며

진부령을 우측으로 낀 금강산의 1만여 봉 중 하나의 봉우리로 해발 1, 296m에 위치해 있다. 진부령에서 정상까지 약 20Km 정도 되는데,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길을 전봇대 숫자를 헤아리며 올라가곤 했다. 아마 300 여개쯤 되었던 것 같다.


북쪽으론 금강산이 보였고( 가끔 날씨가 좋으면 김일성 동상이 반짝였고,간간히 대남 방송도 들렸다.) 좌측으론 간성읍이, 그리고 정면으론 동해의 파도치는 푸른 바다가, 우측으론 설악산과 속초 까지 훤히 보였다. 발아래로는 알프스 스키장이 부르조아의 심신을 밤새 위로하고 있었다.



해 1월 (1990년1월). 12사단 신병훈련소에서 X뺑이 치고 퇴소한뒤, 나와 동기 5명은 그해 국방일보의 새해 일출 사진을 장식한 향로봉 중대로 전입되었다.
충청도 산골짜기에서 자라났던 나는 다시 산골짜기로 들어가는게 맘에 들진 않았다 - 어차피 강원도가 대부분 산골짜기지만.....

먼저, 대대장 신고를 마치고 잔류해 있던 중대 고참들과 향로봉에 오르려 하니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90년 새해의 기록적인 폭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있을것이다.--- 남부지방도 폭설로 철길이 끊길 정도 였으니까.

하여튼, 향로봉에 눈이 2미터65cm 가 쌓인 바람에(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대대 행정중대에서 열흘 가까이를 대기해야 했고, 엄청난 제설작업과 고참들의 위안부(?) 생활로 열흘을 보냈다. 눈 때문에 보급로가 완전히 막혀서 부식을 헬기로 날라야 할 정도 였다.

이지나고 눈이 어느정도 진정기미를 보이자, 나와 동기 5명은 20Kg 정도하는 더블백과 총기를 갖고 향로봉에 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고참들은 짬밥 덕분에 500MD 헬기를 타고 한방에 올라 갈수 있었고, 재수 없던 중대분대장(단풍하사)이 우리를 인솔했다.

드디어 포대의 검문소를 지나 20km에 이르는 향로봉의 대장정이 시작 되었다.

설작업을 했다지만, 대부분 길은 30cm이상 눈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좀 올라가다보니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눈과 더블백의 과중한 무게로 우린 처음부터 탈진 한 상태로 오르기 시작했다. 헥!헥!

은 안개로 가득했으며, 온세상은 하옛고 우리의 얼굴도 하예져 갔다. 동기들 눈이 하나 둘 풀려가기 시작하자 분대장과 선임들은 본격적으로 군기를 잡기 시작했다. 더블백을 입에 물고 포복(이래서 내 아이디가 포보기였단 말인가? ^^)으로 기어 올라가기도 하고, 머리로 굴리기도 하고..간간히 군화가 뒤통수로 날라 오기도 했다......

가득 쌓인 눈에 머리박아본 사람이 있을까? 하얀 눈이지만 박혀 보니 까맷고 숨은 쉴만했다.....말도 오르다 지친다는 칠절봉을 지나 적개리.. 시간이 갈 수록 동기넘들이 흐느적 거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우리들 중 덩치가 제일 좋았던 한재희 이병이 헷소리를 시작했고, 그 이후 몸무게 높은 놈부터 낮은 놈 순으로 하나둘 퍼져가고 있었다. (- 다행이 나는 몸무게가 제일 적었다. 당시 55키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눈앞의 길이 안보인다는 것이었다. 온통 하야니 산과 하늘과의 경계가 보이질 않아 마치 안개속에 떠다니는 기분이었고, 어느정도 정신도 흐려지니 시력이 극히 떨어졌다. 동기 한재희가 길을 못찾기 시작했고 절벽아래로 내려 갈려는 것을 간신히 말리기도 했다.

전히 눈에 홀린 꼴이었다. 나와 최남규 이병을 제외한 4명은 졸도 직전이었다(이른바 '퍼졌다') 그리고 그중 1명은 결국 졸도했었던것 같다.(이某 이병이라 기억됨) 나 또한 덩치가 가장 컸던 한재희를 업다시피 부축하여 올랐던 터라 비몽사몽 직전이었다.

급기야, 오르기 시작한지 4시간 이후, 분대장이 P77을때린 덕분에 정상의 중대에선 구조대(?)가 급파되었고 가엾은 신병 병아리 우리 6명은 결국 구출되었다.....엉엉~~~ ㅠㅠ

대장과 소대장에게 신고를 마친후 소대에 들어가 여러 요식행위(퍼진 신삥이 들에겐 군화발이 약!)를 치른후, 더블백을 풀고 중대 뒷편 언덕으로 가서 곧장 눈속으로 꼬꾸라 졌다.

'백자' (당시 피던 담배) 한가치를 꼬사르니 결국 하늘이 노래졌다. 눈앞으론 눈덮힌 금강산이 안개에 묻혀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난 낙오되지 않았다는것과 그림 그리는 재주덕분에 소대와 중대의 귀염을 독차지 했지만, 산을 오르다가 퍼진 우리 동기들은 빠졌다는 이유로 한동안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

 

뒤, 본격적인 향로봉 생활은 시작 되었다. 4월까지 그곳에 있으면서 난 평생보아도 못볼 눈을 보았고, 자연이 만들어낸 무아지경의 절정을 맛 보았다.

벽이면 안기부 근무초소에서 빨갛게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동해바다의 일출을 보았고, 매서운 바람에 햐얗게 흩날리던 눈발과 나무에 덕지덕지 수정처럼 반짝이는 눈꽃의 정원을 수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히, 제설작업에 대해선 할 얘기가 많은데- (말이 제설작업이지 그건 하나의 대역사~공사! 였다.), 눈으로 인해 마치 터널처럼 뚫린 보급로를 지나다니며, 치워도 끝이없는 눈을 수천,수억(? ㅋㅋ)번의 삽질로 베어내어 산밑으로 굴려 내려야 했다.

또한 갑자기 불어닥치는 강풍에 날아가지 않도록 삽을 눈깊히 박고 몸을 지탱해야 했으며, 잦은 눈사태로 긴급대피하던일도 많았다. (이건 울나라가 아니여...)

휴식시간엔 높은언덕에 올라 산밑으로 삽슬레이를 신나게 즐기기도 했다.(삽슬레이: 봅슬레이의 일종?으로서 썰매대신 삽을 타고 달림) 낮엔 하루종일 제설작업을 했고 밤이면 항상 피곤한(?) 고참사수를 재운뒤 거의 철야 근무를 서야 했다.

 

90년 3월~ 향로봉에서 열심히 제설작업 하다가

하 30도를 육박하던 새벽 ROB초소 근무는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밤새 몰아치는 바람소리에 잠자기도 힘들었지만, 새벽녁엔 초소 바깥으로 나가서 반합에 눈을 꾹꾹 눌러 담고 들어와 난로에 녹여서 끓여먹던 따스했던 라면과, 구수했던 그 커피의 맛!.....고참들과의 추억어린 애인얘기,인생얘기......새벽은 밝아오고, 산아래의 바다 밑에서 떠오르던 붉은 태양....


해 4월 G.O.P(전방철책근무)
투입관계으로 우린 산을 내려 왔고, 결국 난 겨울산이 아닌 향로봉은 볼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로봉은 내짧은 인생 을 놓고 볼때 분명, 그 어디와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가장많은 아름다움과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때가 내 감성의 절정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때 나와 고생을 함께했던 동기들을 떠올린다. 대구의 가스배달부 한재희, 새침떼기 같던 최민규. 남자 다웠던 이승용, 병역특례로 산업체 근무했지만, 상사에 대들다 짤려 군대오게된 권광오, 항상 소탈했던 김세연.. 그들과 헤어진지도 6년이 됐다.

다 들 뭐하면서 사는지.......모두들 그립다. 바로 2주 고참이면서 나보다 4살이나 많았고 항상 형님 같던 유석찬병장, 연대 축구 골잡이 양철수 병장, 항상 말많던 쫄다구 문창호, 본인한테 한대 맞고 마산으로 후송갔던 이동수,그리고 가시리를 잘부르던 이기철병장, 내 그림의 열렬한 팬이자 제자였던 박종섭 병장.....

그들이 그립고 향로봉이 다시한번 그립다. 다시한번 가볼 수 있을런지... 1997년 12월

그외 부대사진 몇 장... ^^

몸은 비록 삐적 골았어두 M60 사수였음